미국은 6·25전쟁 때 미군 [0] 송골매 aks**** 번호 618412 10.02.04 11:03 조회 38 미국은 6·25전쟁 때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사상을 입었다. 당시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의 아들 지미 밴 플리트 중위는 B-29 폭격기 조종사로 중공 및 인민군 폭격에 나섰다가 실종되었고, 해병1항공사단장 해리스 장군의 아들 지미 해리스 소령은 미 해병 1사단 7연대 3대대를 지휘하여 아버지의 항공 지원하에 장진호를 돌파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또한 6·25전쟁이 발발하던 해에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680명 중 365명이 참전하였고, 이 중 104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0] wlsekffo tkfzod**** 번호 619642 10.02.09 19:41 조회 6 6·25전쟁 기간 중에 2년을 미8군사령관으로 전선에서 싸운 밴 플리트 장군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전선에서 잃었다. 1952년 4월 4일, 그의 아들 지미 중위는 B-29폭격기를 조종하여 북쪽으로 출격하였다가 실종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60년 전 생면부지의 나라인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참여했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주한미군에 복무 중인 장병이 2009년 6월 현재 7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한미연합사 공보실장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국에 근무하는 장병들은 부대 동료들보다 더 강한 책임감과 애정을 갖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28) 천재 전략가의 귀국
‘상륙작전의 천재’ 맥아더, 원산에서는 결정적 패착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유엔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된 뒤 일본 도쿄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51년 4월 19일 미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6·25전쟁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중앙포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전에 적에게 ‘공간’을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공간을 우회해 적의 후방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개전 초기 영등포 전선을 시찰하는 그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대구 북방에서 포항까지, 왜관에서 함안까지의 사각형 방어선을 설정한 ‘부산 교두보’의 구상도 결국 그의 작품이다. 그 대신 적의 보급선은 길게 늘어났다. 보급선이 길어지면 약점이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인천상륙작전이 꼭 원활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김일성의 독촉으로 북한군은 모든 공격력을 낙동강에 퍼부었다. 따라서 아군의 반격이 쉽지 않았다. 낙동강에서 북으로 밀고 오는 반격이 받쳐 주지 않으면 인천상륙작전은 실패할 수도 있었다. 맥아더는 그 시점에서 군산(群山)상륙작전도 구상했다. 국군과 미군의 반격이 부진할 경우 군산을 통해 제2 상륙작전을 펼쳐 적의 공세를 꺾어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육군 출신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남서태평양 사령관으로서 총 87회의 육·해·공 합동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6·25전쟁을 총지휘하면서 상륙작전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는 뛰어난 천재 전략가가 허점을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국군과 미군·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해 북진을 거듭하고 있을 때 또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원산이 목표지점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착오가 빚어졌다. 미군은 남북으로 뻗은 낭림산맥(狼林山脈)을 중심으로 지휘권을 둘로 나눴다. 서쪽은 월튼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미 8군, 동쪽은 상륙작전을 위해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10군단이 맡았다. 6·25전쟁의 결정적인 패착 가운데 하나였다.
동서로 나뉜 지휘권은 중공군의 거센 공세에 맞춰 일사불란한 반격을 불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면, 당시 인천항과 경부선 철로에서는 효율적인 병력과 보급물자의 이동이 이뤄질 수 없었다. 원산에 상륙시키기 위한 미 해병과 기타 병력이 인천항을 점유하고 있었고, 이들이 먼저 이동하는 바람에 경부선은 마비됐다. 부산에서 평안북도 운산과 함경도로 가는 물자와 병력 이동이 막히는 바람에 아군은 50년 11~12월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하면서 후퇴하는 길밖에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맥아더는 당시 이미 70세의 고령이었다. 더구나 오랜 기간 미 본토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이미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계속 데리고 있었던 참모 그룹, 이른바 ‘필리핀 파벌’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50년 10월에 이미 얻었던 중공군 개입에 관한 정보를 과소평가했고, 뒤이은 중공군의 공세를 얕잡아본 데에는 그를 둘러싼 참모진의 나태와 사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를 미리 방지하지 못한 것은 맥아더의 큰 책임이다.
뉴욕의 환영행사에서 차에 탄 맥아더 장군이 미 1군기에 경례를 하자 오색 카드가 눈발처럼 쏟아지고 있다. [중앙포토]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는 워싱턴 정부와 불화를 빚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미 6·25전쟁을 확전으로 치닫지 않게 관리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군인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는 북진을 주장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 의지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맥아더 본인도 중국과의 전면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 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압록강과 만주 사이에 방사막을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인이기에 앞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철저한 옹호자였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의식은 거기에서 비롯됐다.
워싱턴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쟁이 노 장군’을 해임했다. 그는 일본군이 우세를 보이던 진주만 습격 이후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이 계속 밀릴 때 호주에 있었다. 일본군에 대한 총반격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려 할 때였다. 신문기자 앞에 선 그는 짧게 말했다. “나는 반드시 돌아간다(I shall return).” 침울한 패전 소식에 젖어 있던 미국 국민은 그런 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과감한 상륙작전으로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씩 접수하면서 급기야 도쿄에 정박한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던 장면까지 그는 줄곧 미국의 전쟁영웅이었다.
이제 그가 6·25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1·4 후퇴 때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을 때 그는 내가 있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찾아와 내게 한국군의 궁핍한 사정을 듣고 산더미 같은 식품을 보내줬다. 우리 1사단만이 아니라 한국군 전체가 6개월 동안 특별 급식을 받을 만큼 엄청난 물량의 선물이었다. 그 호방한 사령관, 천재적인 전략가가 6·25전쟁에서 빠지는 게 나로서는 너무 아쉬웠다.
그의 바통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이어받았다. 리지웨이의 후임 미8군 사령관은 2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백전노장들이다. 그들이 보여준 전쟁지휘 스타일은 맥아더 장군과 같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백선엽 장군
◆‘부산 교두보’=6·25전쟁 초기 국군과 미군이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을 일컫는 말이다. 미군은 방어선 전체를 ‘부산 교두보’로 호칭했지만, 국군은 여기다 ‘낙동강 방어선’ 등의 이름을 덧붙였다. X와 Y의 두 축선이 있다. 가장 남쪽으로 밀렸을 때의 X선은 함안~왜관의 남북 100여㎞, Y선은 왜관~포항의 동서 90여㎞ 전선이다. 1950년 8월 중순부터 인천상륙작전 직전까지 약 한 달에 걸쳐 북한군과 국군·미군·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미 8군 사령부가 일부러 획정한 것은 아니고, 북한군 공세에 따라 밀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됐다. 나중에 미 8군 지휘부는 이 선을 대한민국 방어의 마지노선으로 설정한 뒤 반격을 개시했다. 시점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50년 9월 15일이다.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22) 서울 탈환 작전
“서울로 진격” 한강 도하 상륙정 오르니 뜨거운 눈물이 … 저기 멀리 한강이 보였다. 경기도 시흥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떠나 북상하면서 점차 내 앞으로 다가온 파란 물결이 바로 한강이었다. 이제 저곳을 넘으면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이다. 전쟁 기간 동안 그곳을 두 차례 적의 수중에 내줬다. 개전 초기의 북한군과 1951년 1·4 후퇴를 있게 했던 중공군에게 한 번씩 점령됐다.
국군과 미군·연합군의 공세는 더 강해졌다. 전선(戰線)을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작전이 시작됐다. 이번 작전명은 ‘톱(Ripper)’이었다. 과감한 톱질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을까. 어쨌든 일차적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북상하는 게 일이었다. 한강 남안에 진출해 있던 미 25사단이 먼저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기 직전, 미군은 강 너머로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성공적으로 강을 건넌 사단은 포천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어 그 서쪽의 미 3사단이 광나루를 건넜다. 그리고 의정부를 향해 진격했다. 다시 그 서쪽부터 김포 애기봉까지 넓은 지역을 담당한 국군 1사단의 차례였다. 그러나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진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한강 너머로 서울을 보고 있는 심정은 답답했다. 언제 강을 건널까.
중공군에 내줬던 수도 서울을 1951년 3월 15일 국군이 다시 탈환했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15연대 병력이 상륙주정을 타고 마포 쪽 모래사장에 도착한 뒤 시내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리지웨이 사령관은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섣불리 들어갔다가 남아 있는 적들에게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자칫 시가전이라도 벌어지면 아군의 희생이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미 25사단과 3사단이 서울 북쪽을 향해 진군하면 서울 시내는 자동으로 포위되는 국면. 그런 상황에서는 적이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좀 더 기다렸다가 적이 물러나는 추세를 보이면 진격하라는 뜻이었다.
나에겐 적의 눈앞에서 도하작전을 반복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한강을 건너는 척 상륙정을 발진시켜 건너편에 거의 접근했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계속했다. 이른바 양동(陽動) 작전이다. 서해안에 있던 유엔군의 해군 함정들까지 가세했다. 이들 함정은 평안남도 진남포 앞바다에 진출해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상륙을 가장한 작전도 구사했다. 서울과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중공군의 주력 부대 병력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위장 전술이었다.
미 1군단 부군단장인 토머스 해럴드 준장이 찾아 왔다. 나와 함께 김포반도 북단에 올라가 적정을 살폈다. 지프를 타고 언덕에 오르자 강 건너편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적의 총구에서 내뿜는 불꽃이었다. 적의 총탄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두 사람은 급히 몸을 피했다. 좀 더 지체했다가는 적의 총탄에 맞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적들이 한강 맞은편에 포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군은 3월 10일쯤 도하장비를 국군 1사단에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 사단은 대대 규모의 수륙양용차와 고무보트 등 장비를 받아 도하 및 시가전 훈련을 계속했다. 소규모 수색대를 서울로 보내 직접 적정을 탐색하기도 했다. 안성에 주둔했을 때 임시로 편성한 화교 수색대는 이때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작전 중에 전사한 화교 청년도 있었다. 이들은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1951년 3월 14일 밤에 올라온 수색대 보고가 눈에 띄었다. 적이 철수 중이라는 것이다. 경춘선(京春線) 철도를 미군이 이미 차단했고 홍천 지역이 우리 쪽으로 넘어 온 시점이었다. 후방을 포위당한 중공군이 철수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나는 즉시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에게 보고했다.
그의 입에서 “고 어헤드(Go ahead: 진격하라)”라는 짧고 굵은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마포 맞은편 한강 남안에 리지웨이 8군 사령관, 밀번 군단장, 신성모 국방장관, 그리고 내가 섰다. 국군 가운데 가장 먼저 1사단 15연대가 도하하는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상륙정에 올라탄 병력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눈물을 잘 흘려 ‘낙루(落淚) 장관’이라 불렸던 신성모 장관이 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를 잡고서다. 감격에 겨웠던 모양이다. 좀체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나도 가슴이 뛰고 있었다. 장관의 눈물에 전염된 모양이다. 내 눈가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도 이어 지프에 탄 채로 강가에 접안 중이던 상륙정에 올라갔다. 문이 닫혔다. “부르릉-” 하는 힘찬 엔진 소리가 울렸다. 배가 움직여 강 저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약 3개월 적의 군화에 짓밟혔던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을 탈환하는 순간이다. 공산 치하에 두 번 넘겨진 서울이다. 이제 두 번째로 그곳을 되찾으러 나아가는 길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이곳을 우리는 왜 잃었고, 왜 다시 찾아 감격하는 것일까.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량(無量)의 감개가 어느덧 내 가슴에 벅차오르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0] wlsekffo tkfzod**** 번호 619642 10.02.09 19:41 조회 6 6·25전쟁 기간 중에 2년을 미8군사령관으로 전선에서 싸운 밴 플리트 장군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전선에서 잃었다. 1952년 4월 4일, 그의 아들 지미 중위는 B-29폭격기를 조종하여 북쪽으로 출격하였다가 실종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60년 전 생면부지의 나라인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참여했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주한미군에 복무 중인 장병이 2009년 6월 현재 7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한미연합사 공보실장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국에 근무하는 장병들은 부대 동료들보다 더 강한 책임감과 애정을 갖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28) 천재 전략가의 귀국
‘상륙작전의 천재’ 맥아더, 원산에서는 결정적 패착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유엔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된 뒤 일본 도쿄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51년 4월 19일 미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6·25전쟁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중앙포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전에 적에게 ‘공간’을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공간을 우회해 적의 후방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개전 초기 영등포 전선을 시찰하는 그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대구 북방에서 포항까지, 왜관에서 함안까지의 사각형 방어선을 설정한 ‘부산 교두보’의 구상도 결국 그의 작품이다. 그 대신 적의 보급선은 길게 늘어났다. 보급선이 길어지면 약점이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인천상륙작전이 꼭 원활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김일성의 독촉으로 북한군은 모든 공격력을 낙동강에 퍼부었다. 따라서 아군의 반격이 쉽지 않았다. 낙동강에서 북으로 밀고 오는 반격이 받쳐 주지 않으면 인천상륙작전은 실패할 수도 있었다. 맥아더는 그 시점에서 군산(群山)상륙작전도 구상했다. 국군과 미군의 반격이 부진할 경우 군산을 통해 제2 상륙작전을 펼쳐 적의 공세를 꺾어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육군 출신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남서태평양 사령관으로서 총 87회의 육·해·공 합동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6·25전쟁을 총지휘하면서 상륙작전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는 뛰어난 천재 전략가가 허점을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국군과 미군·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해 북진을 거듭하고 있을 때 또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원산이 목표지점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착오가 빚어졌다. 미군은 남북으로 뻗은 낭림산맥(狼林山脈)을 중심으로 지휘권을 둘로 나눴다. 서쪽은 월튼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미 8군, 동쪽은 상륙작전을 위해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10군단이 맡았다. 6·25전쟁의 결정적인 패착 가운데 하나였다.
동서로 나뉜 지휘권은 중공군의 거센 공세에 맞춰 일사불란한 반격을 불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면, 당시 인천항과 경부선 철로에서는 효율적인 병력과 보급물자의 이동이 이뤄질 수 없었다. 원산에 상륙시키기 위한 미 해병과 기타 병력이 인천항을 점유하고 있었고, 이들이 먼저 이동하는 바람에 경부선은 마비됐다. 부산에서 평안북도 운산과 함경도로 가는 물자와 병력 이동이 막히는 바람에 아군은 50년 11~12월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하면서 후퇴하는 길밖에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맥아더는 당시 이미 70세의 고령이었다. 더구나 오랜 기간 미 본토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이미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계속 데리고 있었던 참모 그룹, 이른바 ‘필리핀 파벌’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50년 10월에 이미 얻었던 중공군 개입에 관한 정보를 과소평가했고, 뒤이은 중공군의 공세를 얕잡아본 데에는 그를 둘러싼 참모진의 나태와 사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를 미리 방지하지 못한 것은 맥아더의 큰 책임이다.
뉴욕의 환영행사에서 차에 탄 맥아더 장군이 미 1군기에 경례를 하자 오색 카드가 눈발처럼 쏟아지고 있다. [중앙포토]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는 워싱턴 정부와 불화를 빚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미 6·25전쟁을 확전으로 치닫지 않게 관리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군인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는 북진을 주장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 의지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맥아더 본인도 중국과의 전면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 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압록강과 만주 사이에 방사막을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인이기에 앞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철저한 옹호자였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의식은 거기에서 비롯됐다.
워싱턴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쟁이 노 장군’을 해임했다. 그는 일본군이 우세를 보이던 진주만 습격 이후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이 계속 밀릴 때 호주에 있었다. 일본군에 대한 총반격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려 할 때였다. 신문기자 앞에 선 그는 짧게 말했다. “나는 반드시 돌아간다(I shall return).” 침울한 패전 소식에 젖어 있던 미국 국민은 그런 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과감한 상륙작전으로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씩 접수하면서 급기야 도쿄에 정박한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던 장면까지 그는 줄곧 미국의 전쟁영웅이었다.
이제 그가 6·25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1·4 후퇴 때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을 때 그는 내가 있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찾아와 내게 한국군의 궁핍한 사정을 듣고 산더미 같은 식품을 보내줬다. 우리 1사단만이 아니라 한국군 전체가 6개월 동안 특별 급식을 받을 만큼 엄청난 물량의 선물이었다. 그 호방한 사령관, 천재적인 전략가가 6·25전쟁에서 빠지는 게 나로서는 너무 아쉬웠다.
그의 바통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이어받았다. 리지웨이의 후임 미8군 사령관은 2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백전노장들이다. 그들이 보여준 전쟁지휘 스타일은 맥아더 장군과 같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백선엽 장군
◆‘부산 교두보’=6·25전쟁 초기 국군과 미군이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을 일컫는 말이다. 미군은 방어선 전체를 ‘부산 교두보’로 호칭했지만, 국군은 여기다 ‘낙동강 방어선’ 등의 이름을 덧붙였다. X와 Y의 두 축선이 있다. 가장 남쪽으로 밀렸을 때의 X선은 함안~왜관의 남북 100여㎞, Y선은 왜관~포항의 동서 90여㎞ 전선이다. 1950년 8월 중순부터 인천상륙작전 직전까지 약 한 달에 걸쳐 북한군과 국군·미군·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미 8군 사령부가 일부러 획정한 것은 아니고, 북한군 공세에 따라 밀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됐다. 나중에 미 8군 지휘부는 이 선을 대한민국 방어의 마지노선으로 설정한 뒤 반격을 개시했다. 시점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50년 9월 15일이다.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22) 서울 탈환 작전
“서울로 진격” 한강 도하 상륙정 오르니 뜨거운 눈물이 … 저기 멀리 한강이 보였다. 경기도 시흥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떠나 북상하면서 점차 내 앞으로 다가온 파란 물결이 바로 한강이었다. 이제 저곳을 넘으면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이다. 전쟁 기간 동안 그곳을 두 차례 적의 수중에 내줬다. 개전 초기의 북한군과 1951년 1·4 후퇴를 있게 했던 중공군에게 한 번씩 점령됐다.
국군과 미군·연합군의 공세는 더 강해졌다. 전선(戰線)을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작전이 시작됐다. 이번 작전명은 ‘톱(Ripper)’이었다. 과감한 톱질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을까. 어쨌든 일차적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북상하는 게 일이었다. 한강 남안에 진출해 있던 미 25사단이 먼저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기 직전, 미군은 강 너머로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성공적으로 강을 건넌 사단은 포천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어 그 서쪽의 미 3사단이 광나루를 건넜다. 그리고 의정부를 향해 진격했다. 다시 그 서쪽부터 김포 애기봉까지 넓은 지역을 담당한 국군 1사단의 차례였다. 그러나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진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한강 너머로 서울을 보고 있는 심정은 답답했다. 언제 강을 건널까.
중공군에 내줬던 수도 서울을 1951년 3월 15일 국군이 다시 탈환했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15연대 병력이 상륙주정을 타고 마포 쪽 모래사장에 도착한 뒤 시내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리지웨이 사령관은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섣불리 들어갔다가 남아 있는 적들에게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자칫 시가전이라도 벌어지면 아군의 희생이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미 25사단과 3사단이 서울 북쪽을 향해 진군하면 서울 시내는 자동으로 포위되는 국면. 그런 상황에서는 적이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좀 더 기다렸다가 적이 물러나는 추세를 보이면 진격하라는 뜻이었다.
나에겐 적의 눈앞에서 도하작전을 반복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한강을 건너는 척 상륙정을 발진시켜 건너편에 거의 접근했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계속했다. 이른바 양동(陽動) 작전이다. 서해안에 있던 유엔군의 해군 함정들까지 가세했다. 이들 함정은 평안남도 진남포 앞바다에 진출해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상륙을 가장한 작전도 구사했다. 서울과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중공군의 주력 부대 병력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위장 전술이었다.
미 1군단 부군단장인 토머스 해럴드 준장이 찾아 왔다. 나와 함께 김포반도 북단에 올라가 적정을 살폈다. 지프를 타고 언덕에 오르자 강 건너편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적의 총구에서 내뿜는 불꽃이었다. 적의 총탄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두 사람은 급히 몸을 피했다. 좀 더 지체했다가는 적의 총탄에 맞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적들이 한강 맞은편에 포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군은 3월 10일쯤 도하장비를 국군 1사단에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 사단은 대대 규모의 수륙양용차와 고무보트 등 장비를 받아 도하 및 시가전 훈련을 계속했다. 소규모 수색대를 서울로 보내 직접 적정을 탐색하기도 했다. 안성에 주둔했을 때 임시로 편성한 화교 수색대는 이때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작전 중에 전사한 화교 청년도 있었다. 이들은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1951년 3월 14일 밤에 올라온 수색대 보고가 눈에 띄었다. 적이 철수 중이라는 것이다. 경춘선(京春線) 철도를 미군이 이미 차단했고 홍천 지역이 우리 쪽으로 넘어 온 시점이었다. 후방을 포위당한 중공군이 철수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나는 즉시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에게 보고했다.
그의 입에서 “고 어헤드(Go ahead: 진격하라)”라는 짧고 굵은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마포 맞은편 한강 남안에 리지웨이 8군 사령관, 밀번 군단장, 신성모 국방장관, 그리고 내가 섰다. 국군 가운데 가장 먼저 1사단 15연대가 도하하는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상륙정에 올라탄 병력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눈물을 잘 흘려 ‘낙루(落淚) 장관’이라 불렸던 신성모 장관이 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를 잡고서다. 감격에 겨웠던 모양이다. 좀체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나도 가슴이 뛰고 있었다. 장관의 눈물에 전염된 모양이다. 내 눈가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도 이어 지프에 탄 채로 강가에 접안 중이던 상륙정에 올라갔다. 문이 닫혔다. “부르릉-” 하는 힘찬 엔진 소리가 울렸다. 배가 움직여 강 저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약 3개월 적의 군화에 짓밟혔던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을 탈환하는 순간이다. 공산 치하에 두 번 넘겨진 서울이다. 이제 두 번째로 그곳을 되찾으러 나아가는 길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이곳을 우리는 왜 잃었고, 왜 다시 찾아 감격하는 것일까.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량(無量)의 감개가 어느덧 내 가슴에 벅차오르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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